잊혀져 가는 광양출신 애국지사 금호 김상후 선생

양희성 승인 2019.02.11 00:00 의견 0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우리지역 독립운동가를 알아보자


[한국다중뉴스=양희성 PD]

올해는 3.1 민족독립만세의거와 상해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우리는 독립운동가 하면 흔히 민족대표 33인과 몇 명의 애국지사들을 상기한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숨은 주역은 각 지역과 해외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에 헌신하다 이름없이 순국하신 많은 애국지사들이다.

아쉽게도 우리는 그분들에 대해 다 알지 못한다. 이는 광복은 하였으나 친일을 청산하지 못하였고 불행하게도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벌어지면서 우리의 근. 현대사가 바르게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남 광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상후 선생의 경우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김상후 선생은 1919년 독립만세시위 의거 당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을 선고 받고 형무소에 복역 한 공로로 1992년 4월 13일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나 그의 삶은 그 이상의 의미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암울했던 시대적인 상황으로 자료가 온전히 남아았지 않아 고증에 어려움이 있고, 친일파와 일부의 기득권 세력으로 인하여 광양의 독립운동사가 왜곡되고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김상후 선생은 학문에 전념하여 지역과 서울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많은 선비들과 교류하여 친분을 유지하였다.

특히 성재 김태석, 창강 김택영, 위창 오세창, 우당 이회영, 매천 황현, 소운 황병욱 선생 등과 교류하며 학문과 시국을 논의하였고 종래에는 독립운동에도 뜻을 같이 하였다.

광양의 3.1 민족독립만세의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선대에 물려받은 천석의 재산 모두를 광산개발을 한다는 목적으로 정리하여 상해 독립군 군자금으로 지원했다.

이는 1956년 2월 민주당 광양군당 창당에 참석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과 유석 조병옥 박사로 인하여 밝혀진 사실이다.

이날 김상후 선생의 장남 김동주 선생과 독립운동가 황병욱 선생의 손자 황호일 선생을 청하여 두 가문의 선대에서 거액의 독립군 군자금을 지속적으로 지원해주신 공이 크므로 독립유공자로 등록하여 훈. 포장을 받을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두 분 후손은 “한결 같이 잊지 않고 기억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망명과 애국운동은 나라 잃은 한인(韓人)으로서 당연한 처신인데 애국자라고 굳이 신청해서 인정받을 것까지는 없다”라고 하시며 일체의 훈. 포장을 거절하였다.

세월이 흘러가니 사람도 가고 없어 옛사람이 되고 아름다운 이야기 또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역사가 되었다. 오로지 해공 신익희 선생의 친필과 빛 바랜 한 장 사진이 남아 그날의 이야기를 증명할 뿐이다.

독립운동가 김상후 선생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을 제외한 2명의 아들은 보국대로라는 이름으로 징병되어 만주로 끌려갔으며 나머지 2명의 아들은 일본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갔다.

가산은 몰수 되어 가족의 삶은 피폐했으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 찍혀 감시는 삼엄하여 운신(運身) 자유도 없었다.

몰수된 가산(家産) 중 전남 광양시 옥룡면 용곡리 산 180번지에는 신사당을 지었으며 광복 후에야 헐어내는 수난사를 겪기도 하였다.

앞으로 김상후 독립운동가의 공훈이 재조명 되어, 상훈의 훈격이 격상 되고, 독립만세의거 현창비 및 사당건립, 생가복원 사업등이 활발히 이루어져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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