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금호 김상후 선생 탄생 150주년을 기리며

신민규 시민기자 승인 2020.11.19 15:16 | 최종 수정 2020.11.19 15:55 의견 0

[한국다중뉴스 = 신민규 시민기자]

금호 김상후선생 댁은 조선말기 전남 광양의 유반(儒班)으로 유명했던 가문이었다. 대대로 효자와 충신이 배출되어 조정으로부터 정려가 내려져 고을에서는 덕문복가라 칭찬하였으며, 때로는 만석에 가까운 부를 축척하여 동문외김씨라고도(東門外金氏) 불리었고 구한말 암울했던 국운과 함께 이 가문은 운명을 함께 하였다.

▲ 금호 김상후 선생


금호 김상후선생은 보장된 부귀영화를 초개 같이 버리시고, 민족의식 고취와 농민계몽운동, 부녀자 야학 활동과 육영사업 및 광양 지역의 독립운동과 상해임시정부 독립군 군자금 지원에 일생을 바치셨다.

선생의 자녀들 또한 선생과 뜻을 함께하다 김우주, 김삼주선생은 만주로 김신주, 김말주선생은 일본으로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 김우주선생은 광복 전 만주에서 서거 하시고, 김신주선생은 일본에서 생을 마치셨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은 광복 후 1956년 신익희선생과 조병욱박사가 광양 민주당 군당 창당의 일로 방문 하였을 때 알려진 사실이며, 근래 왜정시 피징용자 명부를 열람하게 되면서 사실로 확인되었다. 비단 이 가문 뿐만아니라 선생과 절친했던 진상 비촌 마을의 황병욱선생 또한 훌륭한 명문가이다.


▲ 소운 황병욱 선생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며, 만석의 재산을 처분하여 북간도 동불사촌으로 이주하여, 우당 이회영선생과 함께 학교를 세우고 직접 약방을 운영하며 독립군을 지원하다 간도참변이 일어나 선생과 장남 황종현선생이 함께 순국하셨다.

일제 식민시대에는 감시를 피해 독립운동과 군자금을 지원해야했기에 신분도 가족도 속여야 했고, 광복 후에는 6.25전쟁과 경제재건을 위해 과거사를 청산하기 어려웠다. 지나간 세월 동안 당시를 기억했던 많은 분들도 이제는 역사의 뒤 안 길로 사라지셨다. 더 늦기 전에 나라를 위해 헌신하셨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발굴하고 공적을 현창 하는데 우리모두 정성을 모아야 할 때이다.

다행이 2019년 광양시는 기미독립운동 100주년 기념과 금호 김상후선생 탄신 150주년을 맞이하여, 광양시민과 향교 유림이 주축이 되어 제5회 전국 한시 공모전을 개최하였고 양재춘선생이 백일장 대회에서 장원의 영예를 차지하면서, 뜻 깊은 행사는 성황리에 마쳤다.

“애국지사 금호 김상후선생 추모”라는 시제로 진행되었으며, 250여편의 옥고가 접수되었다.


壯元 曉山 梁在春 (장원 효산 양재춘)

詩題 : 愛國志士 錦湖 金商厚 先生 追慕 (시제 : 애국지사 금호 김상후 선생 추모)

先生大義冠吾東 (선생대의관오동)

天下何人可與同 (천하하인가여동)

獨立精神稱頌裡 (독립정신칭송리)

平和思想讚揚中 (평화사상찬양중)

憂民節操垂徽跡 (우민절조수휘적)

愛國經綸樹偉功 (애국경륜수위공)

懿績芳名輝竹帛 (의적방명휘죽백)

儒林敬慕永無窮 (유림경모영무궁)

(해석본)

선생의 대의는 우리나라의 으뜸이요

천하에 누가 감히 더불어 같이 할까

독립정신을 칭송하는 속에

평화사상을 찬양하는 중이라

백성을 걱정하는 절조는 아름다운 자취를 드리웠고

나라를 사랑하는 경륜은 위대한 공을 세웠다

의적으로 방명함이 역사에 길이 밫나니

유림의 공경함은 길이 다함이 없도다.

선생의 현손 화답시

迷生祖上顯吾東 (미생조상현오동)

感慨無量謝海同 (감개무량사해동)

祿爵辭任開運動 (녹작사임개운동)

遺田千石獻資功 (유전천석헌자공)

貞忠報國初心貫 (정충보국초심관)

八域鴻儒今讚公 (팔역홍유금찬공)

追慕瓊章層架滿 (추모경장층가만)

夢中念願已成中 (몽중염원이성중)

(해석본)

미생의 조상을 우리나라에서 현창하시니

감개가 무량하여 감사하는 마음 하해와 같습니다.

부귀와 영화를 초개 같이 버리시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셨고

선대의 천석유산은 독립군자금으로 헌납하셨네

정충보국의 초심으로 일관하시니

팔도의 뛰어난 선비들 이제 공을 찬양하네

추모의 죽옥 같은 문장이 층층시렁 가득하니

꿈속에서도 염원했던 일 이미 이루는 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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